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한국사능력검정시험 대비 한국사 요약정리본! (공기업 취업 자격증)

DITTO92 2019. 5. 4. 03:05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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곧있을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 대비하여 한국사 요약정리본을 올려드립니다! 글 맨아래 파일이 있어요.


 

 

<고대>

-구석기시대 최대 발명품은 주먹도끼이다.

-구석기와 신석기 시대는 평등사회였다.

-신석기 시대 대표적인 토기는 빗살무늬토기다.

-신석기 시대는 농경을 시작하여 정착생활을 하였다.

-신석기 시대는 애니미즘, 토테미즘, 샤머니즘이 나타난다.

-청동기시대 농사가 시작되었다.

-청동기시대 대표적 동검은 비파형동검이다.

-철기시대 대표적 동검은 세형동검이다.

-단군 조선은 청동기를 배경으로 한다.

-위만 조선은 철기를 배경으로 한다.

 

-낙랑군을 축출한 왕은 미천왕이다.

-고구려에서 율령을 반포한 왕은 소수림왕이다.(소수림왕-불교수용.태학설립)

-고구려의 수도는 졸본-국내성-평양성이다.(점점 남하함)

-금관가야에서 대가야의 영향력 이동은 고구려의 공격 때문이다.(광개토대왕이 신라를 도와주며 금관가야 공격)

-장수왕의 남진정책을 볼 수 있는 유물은 중원고구려비이다.(광개토대왕릉비 세움)

 

-백제에서 율령을 반포한 왕은 고이왕이다.

-마한을 완전 병합한 왕은 근초고왕이다.

-무령왕은 지방에 22담로를 파견하였다.

-성왕은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,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었다.

-신라의 왕호는 거서간-차차웅-이사금-마립간-왕으로 변하였다.

-신라의 법흥왕은 국방부에 해당하는 병부를 설치하였다.(법흥왕-이차돈 불교수용)

 

-고구려의 귀족회의는 제가회의.

-백제의 귀족회의는 정사암이다.

-신라의 귀족회의는 화백회의.

-고구려의 수상에 해당하는 것은 대대로이다.

-22담로를 지방에 파견한 왕은 무령왕이다.

 

-연개소문은 천리장성 축조과정에서 영향력을 쌓았다.

-흑치상지, 복신, 도침은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하였다.

-안승, 고연무, 검모잠은 고구려부흥운동을 주도하였다.(신라가 당을 견제하려고 지원했음)

-매소성과 기벌포전투로 신라는 당을 측출하였다.

-진골 최초의 왕은 무열왕이다.(무열왕 김춘추)

-신문왕은 관료전을 지급하고, 녹읍을 폐지하였다.(통일신라중대 왕권강화책)

-김흠돌의 난은 신라 중대에 일어났다(신문왕때).

-김헌창의 난은 신라 하대에 일어났다.(통일신라하대 왕권약함)

-호족은 풍수지리선종을 선호했다.(통일신라 말기)

-5소경에서 서원경은 지금의 청주.

-대흥이란 연호를 사용한 발해왕은 문왕이다.(인안은 무왕이 사용)

-선왕시기 발해는 해동성국이라 불렸다.

-발해의 중앙행정 조직은 36 체제였다.

-발해의 감찰기관은 중정대이다.

-발해의 교육기관은 주자감이다.

 

-왕토사상은 모든 토지가 왕에게 속한다는 사상이다.

-전주 전객제에서 전주는 수조권자다.

-지주 전호제에서 지주는 소유권자이다.(정률제에서 정액제로 바뀌는 추세)

-관리가 복무한 대가로 국가는 녹봉과 수조권을 지급하였다.

-대동법은 공납의 부과기준이 호에서 토지로 바뀐 것이다.

 

-고구려의 진대법은 춘대추납 제도이다.

-신라 성덕왕은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였다.

-신라의 화랑도화백회의는 씨족사회의 전통이 반영되었다.

-신라의 골품제는 폐쇄적 신분제도이다.

-발해의 피지배층은 말갈족이 다수였다.

 

-고구려는 전진에서, 백제는 동진에서 불교를 수입하였다. (4C 초반에)

-불교 대중화의 길을 연 승려는 원효.

-혜초는 지리지 역할을 하는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하였다.

-고구려의 태학은 현재의 대학 기능을 하였다.

-고승전, 화랑세기, 한산기의 저자는 김대문이다.

 

-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다.(통일신라 대표적 탑인 석가탑내 발견)

-고구려 장군총은 돌무지 무덤이다.

-벽화가 그려져있는 고구려무덤 양식은 굴식돌방무덤이다. (사신도 벽화가있음)

-신라의 무덤양식은 돌무지 덧널 무덤이다. (도굴이 어려움)

 

-백제 멸망의 기록이 쓰여진 탑은 정림사지5 석탑이다.

-신라 하대에는 선종의 영향으로 승탑이 많이 세워졌다.

-일본 다카마쓰 고분벽화와 유사한 벽화는 고구려 수산리고분 벽화이다.

-백제 왕인은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주었다.

 

<고려>

-고려 지배층은 호족-문벌귀족-무신-권문세족 순이다.

-태조는 연대책임을 지우는 사심관제도를 시행하였다.

-고려는 신라의 상수리제도와 유사한 기인제도를 시행하였다.

-광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노비안검법과거제를 시행하였다.(왕권강화책)

-성종은 지방12목에 지방관을 파견하였다.

 

-중서문하성의 관리는 재신과 낭사로 구성된다.

-중추원의 관리는 추밀과 승선으로 구성된다.

-고려의 지방행정조직은 5양계로 구성된다.

-고려의 중앙군은 26.

-고려의 지방군은 5도에 주현군, 양계에 주진군으로 구성된다.

 

-문벌귀족은 정치적 특권으로 음서제를 활용하였다,

-문벌귀족은 경제적 특권으로 공음전을 지급받았다,

-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은 개경파와 서경파의 대립에서 비롯되었다.

-경대승은 도방을 설치하였다.

-최충헌의 최고 권력기관으로 교정도감을 활용하였다.

-최우의 정방은 인사권을 장악하였다.

 

-강동6주획득에 앞장 선 인물은 서희이다.

-윤관은 여진족을 몰아내고 동북9을 확보하였다.

-원 간섭기에 2성은 첨의부로 격하되었다.

-원 간섭기에 6부는 4, 중추원은 밀직사로 격하되었다.

-원 간섭기에 평양에 동녕부가 설치되었다.

-공민왕은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였다 (원나라가 일본원정실패하고 내정간섭 기구됨)

 

-경종은 시정전시과를 시행하였다.

-목종은 개정전시과를 시행하였다.

-문종은 경정전시과를 시행하였다.

-관청 운영을 위해 지급된 전시과는 공해전이다.

-궁궐운영을 위해 지급된 전시과는 내장전이다.

 

-민정문서는 고려에서 호적과 양안으로 대체되었다.

-고구려의 진대법과 같은 기능을 고려에서는 의창이 했다,

-고려시전을 감독하기 위해 경시서가 설치되었다. (서울경, 시장감시)

-고려 상평창은 물가조절기관이다.

-성종시기 철전인 건원중보가 발행되었다. (고려초기-태조, 광종, 성종)

-고려의 최대 무역항은 벽란도이다.

 

-고려의 문벌귀족-무신-권문세족-신진사대부 순으로 지배층이 교체되었다.

-중앙관청에서 근무하는 중류층은 서리.

-고려의 일반 농민을 지칭하는 용어는 백정이다.

-고려 노비 관련법은 일천즉천법천자수모제가 있다.

-고려의 춘대추납 제도는 흑창에서 의창으로 발전하였다.

-향도는 매향활동을 하기위해 군현단위로 조직되었다. (향나무)

 

 

-예종은 관학 진흥책의 일환으로 양현고를 설치하였다. (최충헌의 문헌공도 사학 발달)

-고려 초기 승려 균여는 화엄종을 발전시켰다.

-고려 말기 승려 보우는 임제종에 영향을 받아, 불교개혁을 주도하였다.

-고려 후기 승려 요세는 참회를 통해 극락왕생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.

-고려는 도관에서 초제를 주관하였다.

 

-거란족 침입을 막기 위해 초조대장경을 간행하였다.

-몽골족 침입을 막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간행하였다.

-의상이 창건한 부석사에는 주심포양식의 무량수전이 있다.

-무신 정권 때 유행한 청자는 상감청자이다.

 

<조선전기>

-신진사대부는 위화도회군과 과전법 시행으로 권문세족을 압박하였다.

-정도전은 재상중심의 정치를 지향하였다.

-태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6조 직계제를 시행하였다. (세조도 왕권강화를 위해)

-세종은 의정부의 권한을 존중하는 의정부 서사제를 시행하였다.

-경국대전을 시작한 왕은 세조이며, 완성한 왕은 성종이다.

-성종은 홍문관을 통해 경연과 서연을 시행토록 하였다.

 

-조선시대 역사편찬 담당부서는 춘추관이다.

-조선 향리는 외역전이 지급되지 않았다. (고려향리는 지급됨)

-고려는 5도에 안찰사, 조선은 8도에 관찰사를 파견하였다.

-수령은 행정권, 사법권, 군사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. (중앙에서 파견)

-조선의 군사제도는 양인개병과 병농일치를 기반으로 한다.

-조선 전기의 중앙군은 5였다.

-조선에는 고려와 달리 무과가 항시 시행되었다.

 

-사림이 향촌에서 유향소를 통해 여론을 형성하였다. (유향소를 견제하려고 경재소 설치)

-서원은 제사와 교육의 기능을 병행하였다.

-조선의 4대 사화는 무오사화, 갑자사화, 기묘사화, 을사사화이다.

-연산군은 무오사화, 갑자사화 시 왕이었다. (무오-김종직 조의제문, 갑자-연산군 어머니)

-기묘사화 당시 왕은 중종이었다. (기묘-조광조)

-을사사화 당시 왕은 명종이었다. (외척간의 세력다툼)

 

-북평관은 여진의 사신을 맞이하기 위한 곳이다.

-4군과 6을 개척하기 위해 남방의 주민을 이주하는 사민정책이 추진되었다.

-세종은 일본에게 부산포, 제포, 염포를 개방하였으며, 계해약조를 체결하였다.

-길주의 북관대첩비는 정문부 의병장과 관련이 있다.

-임진왜란 휴전기에 중앙군인 훈련도감과 지방군인 속오군이 정비되었다.

-병자호란, 임경업은 백마산성 항쟁을 주도하였다.

 

-과전법은 원칙적으로 세습되지 않지만, 수신전, 휼양전 명목으로 일부 세습되도록 하였다.

-세조가 시행한 직전법은 현직관리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도록 하였다.

-수조권이 폐지되고, 녹봉이 전면적으로 실시된 시기는 명종시기이다.

-공법 이전의 수취기준은 답험손실법에 의해 정해졌다. (그래서 불평등했음)

-직전법 시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폐단을 줄이기 위해 관수관급제가 시행되었다.

 

-조선전기 지대 수취기준법은 1/2세인 타조법이 주로 적용되었다. (정률제)

-조선전기 지폐로는 저화가 있다.

-조세 수취 기준법은 과전법에서 공법으로 바뀌었다.

-조선 전기 공납의 폐단으로 방납이 있었다.

-역에서 빠지기 위해 다른사람을 대신 세우는 대립제와 포를 내고 빠지는 방군수포제

시행되었다.

-대표적인 농서로는 세종 때 농사직설과 성종때 금양잡록이 있다.

 

-경국대전에는 조선의 신분제를 양천제로 규정하였다.

-양반은 면제의 특권이 있었다.

-서얼은 원칙적으로 문과응시가 금지되있다.

-조선시대 수군,역졸,봉수군의 신분은 신량역천이었다.

 

-조선시대 유망민을 관리하던 곳은 동서 활인서이다.

-조선시대 다섯호를 하나로 묶어 감시하던 시스템은 오가작통제이다.

-지방관의 사법권한은 2차 갑오개혁때 재판소 설치를 통해 분리되었다.

-서원에서도 절도있는 음주문화를 위해 향음주례를 시행하였다.

-유향소를 견제하기 위해 중앙에 경재소를 설치하였다.

 

-정도전은 조선건국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역사서로 고려국사 편찬을 주도하였다.

-성종의 대표적 3대 편찬 사업으로는 동국통감, 동국여지승람, 경국대전이 있다.

-세종 시기 그림과 글을 붙인 윤리서로 삼강행실도가 간행되었다.

-최초의 서원은 주세붕의 백운동 서원이다.

-소수서원에는 안향의 영정이 모셔져있다.

 

-16세기 사람들은 삼강오륜의 실천서로 소학과 주자가례를 보급하였다.

-향약이 군현단위를 규정하는 규약이라면 동약은 촌락단위를 규정하는 규약이다.

-간경도감을 설치한 조선의 왕은 세조.

-이이는 아동용 윤리서로 격몽요결을 저술하였다.

-이황은 성학십도, 이이는 성학집요를 저술하였다. (이요~황도~)

-일본 성리학에 영향을 미쳐 동방의 주자로 불린 인물은 이황이다.

 

-조선의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구려 천문도에 영향을 받았다.

-우리 역사상 최초로 한양을 중심에 놓고 만든 역법서는 칠정산이다. (세종 때)

-태종 때는 계미자, 세종 때는 갑인자가 개발되었다.

-김시습의 최초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저술하였다.

-조선 전기 강희안은 고사관수도를 그렸다.

-성종시기 음악이론서라 할 수 있는 악학궤범이 편찬되었다. (전기에)

<조선후기>

-양란을 거치며 의정부 6조가 유명무실해지고 비변사로 권력이 집중되었다.

-양란을 거치며 중앙군은 5위에서 5군영으로 바뀌었다.

-양란을 거치며 지방군은 영진군에서 속오군으로 바뀌었다.

-임란 초기 많은 피해를 준 제승방략체제는 다시 진관체제로 복귀되었다.

 

-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정여립 모반사건이다.

-1차 예송논쟁의 승리는 서인당이고, 2차 예송논쟁의 승리는 남인당이다.

-영조는 완론탕평, 정조는 준론탕평을 지향하였다.

 

-정조는 왕권강화를 위해 규장각 설치, 초계문신제 실시, 장용영설치, 수원화성을 건립하였다.

-신해통공을 통해 시전상인의 금난전권이 폐지되었다.

-효종시기 송시열과 숙종시기 윤휴 등은 북벌론을 주장하였다.

-독도는 러일전쟁시기 일본 영토로 강제 편입되었다.

-숙종시기 안용복은 일본에 가 독도가 우리 땅임을 알렸다.

-숙종시기 백두산 정계비가 설치되었다.

 

-조선후기 영정법은 토지1결당 4~6두를 내는 것이다.

-대동법 시행으로 공인이 등장하였다.

-균역법 시행으로 재정이 부족해지면서 지주에게 결작이 부과되었다. (영조)

-조선후기에는 조세의 금납화와 조세의 전세화 경향이 확대되었다.

 

-밭농사에서 조선 전기에는 농종법, 후기에는 견종법이 유행하였다.

-논농사에서 조선 전기에는 직파법, 후기에는 모내기법이 유행하였다.

-조선 후기 농서로는 신속의 농가집성, 서유구의 임원경제지가 있다.

-지대에서 조선전기는 타조법, 후기에는 도조법이 확산되었다.

 

-조선 후기 공인은 대동법의 실시와 관련이 깊다.

-송상은 전국에 지점으로 송방을 두었다.

-상평통보는 숙종시기에 주조되어 유통되었다.

-선대제는 상인이 수공업자에게 원료나 자본을 미리 대주는 제도이다. ( CEO )

-조선후기 화폐유통이 활발해지면서 디플레이션 현상인 전황이 나타났다.

-조선후기 광산 경영에 있어 전문경영인인 덕대가 등장하였다.

 

-정조는 서얼 출신들을 규장각 검서관에 기용하였다.

-조선후기 시행된 종모법은 일천즉천법을 약화시켰다.

-향촌에서 구향과 신향의 대립을 향전이라 한다.

-향약이 수령 관장으로 넘어온 시기는 정조시대이다.

 

-삼정이란 전정, 군정, 환곡을 말한다.

-세도가문은 비변사를 장악하고 정치를 좌지우지하였다.

-동학에서 경전에 해당하는 것은 동경대전이다.

-동학에서 찬송가에 해당하는 것은 용담유사이다.

-19세기 초 순조시기에 평안도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다.

-임술농민봉기와 관련해 대책마련을 위해 세운 것이 삼정이정청이다.

 

-실천과 지행합일을 강조하는 유학으로 양명학이 있다.

-동학의 교주 최제우는 흥선대원군 집권시기에 처형되었다.

-윤휴와 박세당은 6경과 제자백가와 같은 원시유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.

-인물성동이논쟁은 노론당 내부에서 주로 전개되었다.

 

-조선후기는 서양역법에 영향을 받은 시헌력을 도입하였다.

-이제마는 사상의학을 정립하였다.

-조선후기 풍속화의 대가로는 김흥도와 신윤복을 들 수 있다.

-조선후기에는 청화백자가 유행하였다.

 

-유형원은 반계수록을 저술하였다.

-이익은 성호사설을 저술하였다.

-정약용은 경세유표, 목민심서 등을 저술하였다.

-유수원은 우서를 저술하였다.

-홍대용은 임하경륜을 저술하였다.

-박지원은 열하일기를 저술하였다.

-박제가는 북학의를 저술하였다.

 

<근대사>

-흥선대원군 대내개혁의 목표는 왕권강화였다.

-흥선대원군은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부활시켰다.

-경복궁 중건을 위해 정부는 당백전을 발행하고, 원납전을 징수하였다.

-양반의 특권인 군역의 면제는 호포법 시행으로 타격을 받았다.

-공무원의 비리를 근절하기 위해 환곡제 대신 사창제를 시행하였다.

 

-병인양요의 원인은 병인박해였다.

-병인양요 당시 문수산성에는 한성근이 정족산성에서는 양헌수가 활약하였다. (한문)

-오페르트는 독일인이다.

-신미양요의 원인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이다.

-신미양요 직후 흥선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다.

 

-오경석은 영환지략, 해국도지를 청으로부터 들여왔다.

-오경석과 유홍기는 신분상 중인이었다.

--일무역규칙에는 무항세, 무제한 곡물유출, 무관세 조항이 들어가있다.

-강화도 조약에는 최혜국대우 조항이 없다.

 

-온건개화파는 중국 양무운동중체서용 방식에 영향을 받았다.

-급진개화파는 일본 메이지유신문명개화론 방식에 영향을 받았다.

-개항 직후 개화를 총체적으로 컨트롤하는 통리기무아문이 있다.

-재정부족으로 중도 귀국한 사절단은 영선사이다.

--미 수호 통상조약에는 최초로 관세조항이 삽입되었다.

-김홍집이 가져온 조선책략에 대해 영남유생들은 영남만인소로 항의하였다.

 

-5군영은 고종정부에 의해 2으로 개편되었다.

-개항 직후 신식군대 별기군이 창설되었다.

-임오군란의 결과 일본과 제물포조약을 체결하였다. (임제 조청)

-임오군란의 결과 청과 -청 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였다.

-임오군란의 결과 독일인 묄렌도르프가 청에 의해 파견되었다.

 

-갑신정변 세력들은 세금문제를 지조법 개혁으로 바꾸고자 하였다.

-갑신정변 세력들은 보부상의 특권을 보장해주는 혜상공국 혁파를 주장하였다.

-갑신정변 세력들은 호조를 통해 재정을 일원화 하고자 하였다.

-갑신정변 이후 청과 일본은 텐진조약을 체결하였다.

 

-동학농민운동의 포접제 조직은 운동 확산에 큰 기여를 하였다.

-동학농민운동은 교조신원운동에서 반봉건, 반외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.

-전주화약이후 농민은 집강소, 정부는 교정청을 설치하였다.

-2차 농민봉기에서는 남북접이 연합하여 우금치로 향하였다.

 

-갑오개혁 직전의 연호는 광서였다.

-1차 갑오개혁을 이끈 중심 부서는 군국기무처였다.

-의정부 6조는 의정부 8아문으로 바뀌었다.

-재정의 일원화를 탁지아문 중심으로 이루려하였다.

-은본위제를 시행하였다.

-경국대전에 규정된 신분제 양천제는 갑오개혁을 계기로 폐지되었다.

 

-2차 갑오개혁에서 의정부 8아문은 내각과 7로 바뀌었다.

-지방조직은 8에서 23로 바뀌었다.

--일 전쟁 강화조약으로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. (청의 영토요구)

-을미개혁에서 태양력이 채택되었다.

 

-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을 아관파천이라 한다.

-광무개혁의 정신은 구본신참이다.

-고종은 군사권 강화를 위해 원수부를 설치하였다.

-양전 사업을 통해 토지의 소유권을 밝히는 지계발급을 시행하였다.

 

-독립협회는 서재필의 급진파에서 윤치호계의 온건파 세력으로 넘어간다.

-관민공동회에 정부대표로 박정양이 참석한다.

-관민공동회에서 헌의6가 채택되었다.

-의회설립운동의 결과 중추원 관제가 선포되었다.

 

-보안회는 일제의 황무지개간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.

-헌정연구회는 일진회를 비판하였고, 을사조약을 반대하다가 해산되었다.

-대한자강회는 고종의 강제퇴위를 비판하다가 보안법이 적용되며 해산되었다.

-비밀결사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신민회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해산되었다.

 

-을미의병은 고종의 해산 권고를 수용하였다. (유생의병장의 한계)

-을사의병장 최익현은 쓰시마섬에 끌려가 그곳에서 순국하였다.

-국제법상 교전단체 허용을 주장한 의병은 정미의병이다.

-장지연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었다.

-나철, 오기호는 오적 암살단을 조직하였다.

 

-강화도 조약의 부속 조약인 -일 무역규칙에는 관세 조항이 있다.

-최초로 최혜국 대우가 규정된 조약은 -미 수호통상조약이다.

 

-외국인들의 내지무역이 허용되면서 상회사인 대동상회, 장통상회가 만들어졌다.

-방곡령은 조-일 통상장정에 의해 규정되었다.

-황국중앙총상회는 시전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다. (보부상과 시전상인은 다름)

-황무지개간반대운동에 앞장선 단체는 보안회농광회사.

-국채보상운동(1907)대구에서 출발하였다.(대한매일신보 지원)

 

-대한제국은 간도관리사 이범윤을 파견하였다.

-간도협약에서 우리가 배제된 것은 을사조약이 배경이다.(을사조약 외교권 박탈)

-최초의 공식 이민자가 도착한 곳은 하와이.(사탕수수 농장)

 

-영국인 베델은 대한매일신보를 지원하였다.

-만세보는 천도교의 기관지이다.

-최초의 상업광고를 실은 신문은 한성주보이다.

-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는 경인선이다.

- -일 전쟁 수행을 위해 경부선경의선을 개통하였다.

 

-최초의 근대식 학교는 원산학사.

-최초의 국립 근대식학교는 육영공원이다.(미국인 교사 헐버트)

-오산학교(이승훈)대성학교(안창호)는 신민회 회원들이 세운 학교다.

-조선 광문회는 고전을 정리하고 간행하였다. (박은식,최남선)

-소설 은세계는 원각사에서 연극으로 올려졌다.

 

-한일의정서는 러일전쟁시 일제가 군사목적의 토지를 사용토록 규정하였다.

-1차 한일협약으로 고문정치가 시작되었다.

-2차 한일협약으로 통감부가 설치되었다.

-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고종은 퇴위되고 순종이 뒤를 이었다.

-기유각서를 통해 대한제국의 사법권이 박탈되었다.

 

-1910년대 일제는 회유책으로 중추원을 설치해 총독부의 자문기관으로 활용하였다.

-조선태형령은 조선인에게만 적용된 체벌규정이다.

-1920년대부터 총독은 문관출신도 될 수 있었다.

-1940년대 조선어 사용금지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생하였다.

 

-1910년대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였다.

-1920년대 일제는 산미증식계획을 실행에 옮겼다.

-1930년대 농촌진흥운동은 농촌의 비참한 실상을 개선코자 진행되었다.

-1938국가총동원령은 일제의 수탈 정책을 가속화시켰다.

-1930년대부터 일제는 조선을 병참기지화 하였고, 남면북양 정책도 시행하였다.

 

-독립의군부는 국권반환 요구서 제출을 계획하였다.

-독립의군부는 고종의 밀지를 받고 복벽주의를 지향하였다.

-대한광복회는 공화정을 지향하였다.

-이상설은 연해주(블라디보스톡)에서 대한광복군 정부를 수립하였다.

-이상설은 북간도에 서전서숙을 건립하였다.

 

-일본에서 2.8독립 선언이 나왔다.(3.1운동에 영향을 줌)

-임시정부는 연통제교통국을 통해 자금과 정보를 조달받았다.(애국공채 발급)

-임시정부는 만주에 광복군 총영을 개편하여 참의부를 조직하였다.

-국민대표회의는 창조파와 개조파가 대립하였다.(창조파신채호 개조파안창호)

 

-6`10만세운동은 순종의 인산일을 활용하였다.

-소년운동은 천도교에서 주도하였다.

-신간회(1927)의 자매단체인 근우회(1927-1931)가 여성운동을 주도하였다.

-김원봉은 만주지역에서 의열단을 조직하였다.

 

-구한말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서 시작되었다.

-일제 강점기 물산장려운동은 평양에서 시작되었다.(사회주의세력은 반대함)

-브나로드 운동은 1930년대 초반에 시작되었다.

 

-국공합작에 영향을 받아 북경에서 안창호의 주도로

한국 독립 민족 유일당 북경 촉성회가 수립되었다.

-1927년 결성된 신간회는 민중대회사건을 계기로 해소되었다.

 

-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모두 참전하였다.

-밀산부 한흥동에서 서일이 이끄는 대한독립군단이 결성되었다,

-자유시 참변 이후 참의부, 정의부, 북만주의 신민부가 결성되었다.

-미쓰야 협정으로 인해 3부 활동이 제한받았다,

-3부 통합운동의 결과 북만주에서는 혁신의회, 남만주에서는 국민부가 결성되었다.

 

-민족혁명당은 조소앙의 한국독립당, 지청천의 조선혁명당, 그리고 의열단이 이루고 있다.

-조선민족전선연맹의 산하부대가 조선의용대이다.

-임시정부의 산하부대는 한국광복군(김구)이다.

-조선 독립동맹의 산하부대는 조선 의용군이다.

 

-2차 조선교육령에서 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이 4년에서 6년으로 늘어났다.

-조선어 연구회는 가갸날을 제정하고 잡지 한글을 발행하였다.

-조선어 학회의 우리말큰사전 편찬사업은 중단되었으며, 광복이후 사업이 재개되었다.

-최초의 근대 소설이라 불리는 이광수의 무정1910년대 발간되었다.

 

-1926나운규의 아리랑이 상영되어 많은 인기를 끌었다.

-박은식의 한국통사는 을 강조하였다.(박은식은 유교구신론 주장)

-1930년대 정인보는 역사에서 을 강조하였다.

-백남운은 사회주의에 입각한 사회경제사학을 연구하였다.

-천주교와 관련이 있는 의민단은 봉오동, 청산리 전투에 참여하였다.

 

<현대사>

-한국의 독립을 최초로 약속한 국제회담은 카이로 회담이다.

-조선건국동맹은 광복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계승되었다.

-건준위는 미군정과의 협상을 위해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.(미군정은 부정함)

 

-모스크바3상 회의에서는 4신탁통치안이 나왔다.

-모스크바3상 회의에서는 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였다.

-이승만은 정읍에서 남한 단정론을 제기하였다.

-우합작 운동의 주요인사는 여운형과 김규식이다.(초기 미군정이 지원함)

 

-유엔 총회에서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이 제기되었다.

-유엔 소총회에서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총선 실시가 정해졌다(남북협상의 계기)

-제헌 의원이 임기는 2이다.(5.10총선)

-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국회에서 선출되었다.

 

-이승만 정부는 공소시효 축소를 통해 친일파처단에 실패하였다.

-이승만 정부는 전쟁직전에 농지개혁을 통해 토지분배를 시작하였다.(유상몰수 유상분배)

-이승만 정부는 휴전회담을 막기위해 반공포로를 석방하였다.

-이승만 정부는 휴전의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주한미군주둔경제원조(삼백산업발전에 기여) 약속을 받아냈다.

 

-발췌 개헌안의 핵심은 대통령직선제 이다.(국회에 야당의원이 대거 등용)

-2차 개헌안은 사사오입개헌안이라 불린다.

-2차 개헌안의 핵심은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제한을 폐지하는 것이다.

-진보당 당수 조봉암은 평화통일 당론이 북한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사형되었다.

-이승만 정부 말기 언론탄압의 대표적 사례는 경향신문 폐간이다.

 

-3차 개헌의 핵심은 의원내각제, 양원제의 시행이다.(장면정부-대통령윤보선 국무총리장면)

-4차 개헌의 핵심은 3‘15부정선거 사범처리를 위한 소급입법이다.

-5차 개헌의 핵심은 대통령제, 단원제의 시행이다.(박정희 정부 등장)

-5‘16군사 정변을 통해 설치된 최고 권력기구는 국가재건최고회의.

 

-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의 용어는 (-)수교와 관련이 있다.

-라이따이한, 고엽제와 관련된 사건은 한국의 (베트남 파병)이다

-6차 개헌을 다른말로 (3선 개헌)안 이라고 한다.

 

-10월 유신의 핵심은 대통령(직선제)이다.

-유신헌법에서 대통령은 (통일주체국민회의)에서 선출된다.

-유신헌법에서 대통령의 임기는 6년이다.

-(긴급 조치권)은 유신에 반대하는 세력을 탄압하는데 활용하였다,

 

-10,26사태 뒤 최규하국무총리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.

-8차 개헌은 대통령의 임기가 7년 단임제로 규정되었다.

-전두환은 대통령에 2번 취임하였다.

-4,13호헌조치는 8차개헌안을 유지하겠다는 내용이다.

 

-북한의 토지개혁은 5정보이상, 남한의 농지개혁은 3정보이상의 토지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다.

-남한의 농지개혁시기 유생매입의 대가로 유가증권을 지급하였다.

-1950년대 이승만정부는 미국의 원조에 의지하였다.

-1950년대 삼백산업이 발달하였다.

 

-1960년대 경제개발계획은 경공업 발전중심이었다.

-1970년대 경제개발계획은 중화학 공업 발전 중심이었다.

-김영삼 정부는 세계무역기구 WTO에 가입하였다.

-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 시작된 시기는 전두환 정부 때이고,

타결된 시기는 김영삼 정부 때이다.

 

-7,4남북공동성명을 이행하기 위해 남북조절위원회가 가동되었다.

-7,4남북공동성명 이후 북에서는 사회주의 헌법, 남에서는 유신헌법이 채택되었다.

-남북기본합의서에서는 남북관계를 잠정적 특수 관계로 규정하였다.

-남북기본합의서에서는 남북간 교류를 민족내부교류로 규정하였다.

-6,15남북공동선언 이전에 해로 금강산 관광은 시작되었다.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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